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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산행일기

노고단의 일출

by 신영석 2020. 10.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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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이원규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천왕봉 일출을 보러 오시라

삼대째 내리 적선한 사람만 볼 수 있으니

아무나 오시지 말고

노고단 구름바다에 빠지려면

원추리 꽃무리에 혹심을 품지 않은

이슬의 눈으로 오시라

 

행여 반야봉의 저녁 노을을 품으려면

여인의 둔부를 스치는 유장한 바람으로 오고

피아골의 단풍을 만나려면

먼저 온 몸이 달아오른 절정으로 오시라

- 중략 -

그러나 굳이 지리산에 오고 싶다면

언제 어느 곳이든 아무렇게나 오시라

그대는 나날이 변덕스럽지만

지리산은 변하면서도 언제나 첫 마음이니

행여 견딜만하다면 제발 오지 마시라

 

시인이 말하듯 천왕봉의 일출은

삼대째 적선을 못하였고

나이에 걸맞지 않게 떨어진 체력도 문제다.

그래도 7~8년전 어렵사리 천왕봉의 일출을

감질날만큼 훔쳐본 적이 있었다.

2년전 11월 첫날에 노고단 일출을 보러갔지만

일출은 커녕 노고단의 이른 겨울날씨에

개떨듯 떨며 고생을 하고 예상치 않았던

상고대만 눈에 담아왔던 아쉬움에

한달여를 앞당겨 다시 한번 노고단의

일출을 만나기 위해 자정이 되어가는

시간 평택역에서 열차에 몸을 싣는다.

 

성삼재에서 내려다 본 구례 야경

시월 초순임에도 거센 바람으로 체감은

이미 겨울을 느끼기에 부족하지 않았고

손가락이 시려워 모드 변경자체도 어렵다 보니

사진은 엉망인듯 싶다.

동이 트기 전 어둠을 지키고 있는

반달곰도 흔들렸다.

 

노고단을 오르는 길에는 한가위를 몇일 지난

훤한 달빛으로 랜턴없이도 걸음만 했다.

노고단대피소에서 라면을 끓여 허기와 한기를 달랜다.

핸폰 현재의 날씨와는 달리 체감온도는 영하권이고

노고단으로 오르는 나무테크는 얼어붙어 미끄러웠다.

다행이도 노고단에 오르니 구름 치마를 두른

천왕봉 뒷편으로 여명이 시작된다.

성삼재에서 이어지는 지리 서북능선은 아직 어둠이다.

노고단은 지금 공사중!

언제 또다시 천왕봉에 갈 수 있을까?

좌측에 반야봉 그리고 우측에 천왕봉

만복대와 지리 서북능선

삼각대를 꺼내 준비해 놓았지만 손가락 마디마디가

얼어 붙는 추위에 염치 불구하고 곁에 계시던

산우님께 부탁하여 한컷 남겼다.

고맙습니다!

지리산 남부능선?

추위에 얼어붙은 오이풀과 산그리메

조금씩 여명의 틈바구니로 일출이 시작된다.

드디어 지리산의 첫 일출을 영접한다.

삼대째 적선을 하지 못하였으니 천왕봉의

일출은 언감생시이고 그래도 삼세번이 아닌

두번째만에 만나는 노고단에서의 일출에

상념에 젖어있던 심신에도 숙연함과 더불어

감동이 밀물처럼 밀려온다.

좀더 오래 머물고 싶었지만 홑겹의 옷깃을

사정없이 파고드는 추위에 손가락도 몸도

얼어붙어 아쉽지만 발길을 돌린다.

아직 견딜만하지 못하니 또다시 지리 당신의

품에 찾아오겠노라는 묵언의 약속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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